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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국  Homepage Email [2018-05-14 01:55:50]  HIT : 30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지음

생각의나무 / 20066/ 290/ 10,000

 

저자 인요한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파란 눈, 갈색 머리칼, 겉모습은 전형적인 서양인이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라치면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밝히는 그는 의리와 인정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영락없는 전라도 사내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는데, 영어보다도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했던 개구쟁이 짠이로 유명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쥐불놀이를 하고 서리를 다니던 순천 친구들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가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이며,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에 와 48년 동안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하신 윌리엄 린튼(인돈) 선교사,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600여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휴 린튼(인휴) 선교사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나눔을 통해 기쁨을 얻는 핏줄을 속일 수 없어 그 자신도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녘의 소외된 이웃들과 결핵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한국의 응급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에도 힘써 왔다.

 

Short Summary

이 책은 저자가 웬만한 전라도 사람보다 더 징한 전라도 사람 인요한으로 살게 된 사연들의 기록이다. 그는 그의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었다. 그의 영혼은 한국 사람들의 그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에 길들여졌다. 그의 기억속의 진짜배기 한국 사람들은 삶이 힘들어도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이었다. 없는 가운데도 즐겁고 밝게 살려고 노력하는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삶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이들 모두가 험한 길을 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사람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 포사이트 선교사와 손양원 목사님 등 모두가 순정한 마음으로 남이 가기 힘든 길 위에서 사랑을 실천했던 분들이었다. 저자 자신도 그들의 생을 좇기를 원했다. 남들이 잘 가려하지 않는 길 위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선교사 아들로서의 숙명이기도 하고, 그가 한국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기도 하다.

 

차례

책을 펴내며 _ 가는 길은 험해도 웃으며 갑시다

 

1 내 고향, 전라도 순천

조선말을 참 잘하십네다 / 1895년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다 / 우주의 중심, 내 고향 순천 / 스코틀랜드 양반 출신 린튼 가 이야기 / 윌리엄 린튼, 유진 벨의 사위가 되다 / 48년 간의 한국 사역

 

2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내 아버지 휴 린튼 / “오메, 니가 개구쟁이 짠이냐?” / 순천의 검정 고무신 / 결핵 퇴치에 앞장 선 어머니 로이스 린튼 / 따뜻한 그 이름, 옥자 누나 / 진정한 사랑의 힘 / 선한 사마리아 선교사, 포사이트 / 내 정신의 거울, 손양원 목사

 

3 의사의 길을 택하다

홈 스쿨링 / 대전외국인학교의 별종 / 순천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 웬수 같은 그놈의 정 / 열등생에서 우등생으로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다 / 1980, 서울의 봄

 

4 805월의 광주,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다

우울한 봄놀이 / 525, 광주로 향하다 / 시민군과 외신기자의 회견을 통역하다 / 아버지와 미 대사관을 찾아가다 / 추방 명령, 유배 / 불순분자 인요한 / 나는 양키가 아니다 / 문무대를 다녀와 흘린 뜨거운 눈물

 

5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다

천신만고 끝에 의대를 졸업하다 / 아버지의 소천 / 한국 의사고시에 합격하다 / 미국에서의 수련의 생활 / 첫 딸 한나 태어나다 / 최초의 한국형 앰뷸런스

 

6 이제는 북한이다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우리는 다 환영합네다” / 작은 화분에서 남북 문제의 희망을 보다 / 북한 결핵치료 사업에 나서다 / 울면서 먹은 고봉밥’ / 할머니 의사, 김애란 선생님 / “남조선은 왜 잘 삽네까?” / 남을 돕는 것은 동시에 나를 돕는 일이다

 

책을 마치며 _ 일상의 안락함에 머물지 않는 삶, 그것이 나의 숙명이자 소망이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지음

생각의나무 / 20066/ 290/ 10,000

 

1 격랑의 시기에 타오른 횃불

 

한국의 근대사는 암울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그러했듯이 한국 역시 서세동점의 시기에 때늦은 판단과 잘못된 선택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세상에 대하여 깜깜했던 한국인들이 임금부터 시골 촌부까지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을 고집할 때 그 문을 연 것은 한 방의 대포였지만, 마음의 문을 두드려 연 이들은 군인도 아니요, 시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다. 조선 땅을 찾아온 최초의 선교사는 의사 알렌이었고,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 부부였다. 알렌은 1884년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는 그 이듬해인 188545일 부활절,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언더우드 목사가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1, 미국으로 되돌아온 언더우드의 순회강연에 감동을 받은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조선으로 파송될 선교사직을 자원했다.

 

그들 7인의 선발대가 전주와 군산 등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의 씨앗을 뿌리고 난 후, 189549일 선교사들이 추가로 파송되었다. 그들 무리 중에 갓 결혼한 한 쌍의 신혼부부가 있었는데, 유진 벨 목사와 부인 로테 벨이었다. 유진 벨은 나주에서 첫 번째 사역을 시작했으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하고 목포로 이동해 18983월부터 선교사역을 재개했다. 고통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한국 사람들의 마음의 문도 조금씩 열렸다. 드디어 벨 목사는 1898515,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목포 선교가 활발하게 결실을 맺어가던 1901, 풍토병으로 그만 부인 로테 벨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지금 서울 양화대교 입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그녀는 이 땅에서 숨진 최초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이 무렵 미국 애틀랜타에 사는 한 청년이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윌리엄 린튼(인돈)은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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