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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국  Homepage Email [2018-05-14 01:50:49]  HIT : 26  

넘어졌다면, 일어나라!

니토리 아키오 지음

서울문화사 / 20167/ 387/ 15,800

 

저자 니토리 아키오

일본의 이케아라 불리는 니토리의 창업자. 가구와 생활용품의 원가를 탁월하게 낮춰 질 좋은 제품을 싼값에 공급하고, 일본 최초로 홈퍼니싱(home furnishing)’ 개념을 도입한 혁신가로 유명하다. 1944년 사할린에서 출생하였다. 1964년 삿포로 단기대학 졸업 후 홋카이가쿠엔 대학 경제학부에 편입하여 1966년 졸업했다. 1967년 니토리 가구 1호점을 내며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2년 미국 가구 산업 시찰 투어에 참가하면서 사업의 큰 비전을 찾게 되었다. 니토리 홀딩스는 2015년 연매출 4,000억 엔을 돌파하였고, 대만, 중국, 미국 등으로 진출하여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43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20162월 현재 29기 연속 증수증익을 달성하며 성장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역자 유윤한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분야의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바위를 들어 올려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생각 버리기 연습, 침묵 입문, 기적의 영업소등이 있다.

 

Short Summary

경기가 나빠 취업도 힘들고 되는 일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다 보니, 시대를 잘못 타고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이케아라 불리는 니토리의 창업자인 니토리 아키오 회장은 시대를 불문하고 인생은 원래 거친 시련의 연속이라며, 어려운 일을 향해 덤비는 도전 정신으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작은 가구점에서 시작하여 일본 최고의 가구 회사가 된 니토리의 성장과정과 그 정신을 소개한다. 저자는 넉넉한 자본이나 스마트한 두뇌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나쁜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것이라며, 용기를 내서 도전하라고 격려한다.

 

저자가 처음 가구점을 개업했을 때, 그는 거의 대인기피증 수준으로 낯을 가렸다고 한다. 이것은 하루 종일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단점을 고치기보다는 장점을 키워야 발전할 수 있다며,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구 공급처를 찾아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에 집중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의 파격적인 사고방식은 회사 경영에서도 발휘되었는데, 니토리는 새로운 시도나 투자를 할 때,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거나 신중을 기하기보다, 일단 되는대로 부딪혀 본다고 한다. 되는대로 부딪히면 당연히 실패하지만, 그 시행착오가 쌓여서 니토리의 저력이 되기 때문이다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공부를 싫어하는 열등생

2장 가수가 되려 했던 청년

3장 되는 일이 없던 시절

4장 모두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5장 스승의 가르침을 지표로

6장 시련에는 끝이 없다

7장 꿈과 비전, 애교와 배짱

 

니토리 아키오 연표

부록 - 프로의 마음가짐 50

넘어졌다면, 일어나라!

니토리 아키오 지음

서울문화사 / 20167/ 387/ 15,800

 

공부를 싫어하는 열등생

[사할린에서 태어난 아이 / 암거래 쌀로 버티다] 나는 1944년에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참전했고, 전쟁에서 패한 뒤에는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태평양전쟁 후 사할린 땅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7년 어머니와 우리는 귀국해 삿포로에 사는 외갓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에야 그 집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다른 귀국자 주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곧 목수 일에 뛰어들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아버지는 조그만 회사를 세웠다. 콘크리트 제품을 만들고, 주택 기초공사를 하는 토목 회사였다. 어머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암거래 쌀장사를 시작했다.

 

[가혹한 유년기 / 왕따 당하는 아이] 내가 유년기를 보낸 1940년대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게 절박했던 때라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실수하면 반드시 꾸짖었고, 항상 매질이 따랐다. 몸이 아프고 열이 나도 집안일은 계속 도와야 했다. 학교생활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고, 나는 공부도 못했다.

 

가수가 되려 했던 청년

[주산 대회 우승]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부터 내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주산만큼은 잘했고, 500명이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 1위도 했다. 이즈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셨다. “넌 느려 터지고 둔해. 그러니까 성공하려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든가.”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머리가 좀 나쁘면 어떠냐? 명문대 나온 우수한 인재를 고용하면 될 거 아니냐?” 나는 이 말을 새겨 두고 오늘날까지 실천하고 있다.

 

[단기대학과 헌팅] 1962, 삿포로 단기대학(우리나라의 전문대학과 비슷함)에 간신히 들어갔다.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고, 가라데부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은 그런대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수업료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편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게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 후 헌팅을 잘하기로 소문난 친구를 찾아가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2년 동안 착실히 배우고 연습했다.

 

[가수를 꿈꾸다] 사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내 꿈은 가수였다. 늘 레코드를 틀어 놓고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심히 연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삿포로에서 열리는 ‘NHK 노래자랑에 출전하게 되었다. 나는 목청껏 부르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한 옥타브가 엇나가고 말았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그냥 계속 부르려는데, 한 소절이 끝나자마자 하고 불합격 종소리가 울렸다.

 

[컨닝으로 명문대 합격? / 깡패 아르바이트] 단기대학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대학 생활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도 점점 커졌다. 그래서 홋카이가쿠엔 대학에 편입 시험을 보고 1964년 드디어 염원하던 홋카이가쿠엔 대학 경제학부의 학생이 되었다. 명문대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안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아는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주로 하는 일은 밀린 외상값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대학 다니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야구부와 유도부 친구들이었다. 방학 때면 이 친구들과 아버지 회사 일을 도왔는데, 나는 집을 짓기 전 기초공사의 감독을 맡아 현장을 돌아다녔다. 체육 동아리 친구들은 돈을 벌면서 체력을 단련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해 주었다. 이들이 부지런히 힘을 쏟자 공사는 척척 진행되었다. 이때 감독인 내가 받은 돈은 회사원 평균 월급의 1.5배 정도였다.

 

되는 일이 없던 시절

[가출과 광고 회사 취직] 1966년 홋카이가쿠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니토리 콘크리트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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