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사역 준거 청소년교육의 역사 프린트   
손종국  Homepage Email [2017-07-12 14:59:38]  HIT : 69  

청소년교육의 역사

 

오랜 동안 청소년은 교회교육에서 특화되어 연구되어 오지 않았다. 일반 청소년연구가 1904년 스탠리 홀이 질풍노도의 시기로 명명되면서 시작된 만큼 교회의 기독교교육에서도 만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청소년교육을 이해하고 청소년교육의 문제점을 파악하며 사역원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청소년교육의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한국 기독교교육의 시작

 

1885년은 한국개신교에 있어서 획기적인 해이다. 1885년은 개신교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처와 언더우드 목사가 공식 내한했고1910년은 일제에 의한 강제 합병이 있었다. 이 시기는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수용 시기가 될 뿐 아니라 또한 개신교에 의한 근대 교육이 본격화된 민족 교육의 형성기이기도 하다.

아펜젤러는 188583일 배재학당을 세움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교육의 첫 시작이 되었다. 이 학교는 188768일 고종이 친히 배재(培材)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편 스크랜톤은 1886530일 여자 교육을 위하여 정동에 이화학당을 창설하였는데 이러한 교육기구의 설립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국립병원 부설의학교에서 화학물리를 가르치면서 1886년 늦게 일종의 기숙학교를 시작(자비로 운영, 최초로 숙식을 학교에서 담당하는 기관)하여 이를 고아원이라 부른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교회 데비스 남매가 와서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교육의료사업이 시작되었고1896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로부터 맥캔지를 선교사로 보내어 함경도자방을 중심으로 선교의료교육 사업을 하면서 병원과 학교를 경영하였다.

한편1885년부터 19102월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수는 950여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근대학교의 설립은 선교사들에 의해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자신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985년에 새문안교회은 영신학당(10년후 협성학교라 칭함)1904년 상동교회는 청년학원 설립하였고 도산 안창호는 평양 대성학교이승훈은 정주 오산학교을 세웠다.

한국의 처음 교회교육(주일학교)1887년에 태동되어 18881월부터 시작되었는데1888115일 이화학당에서 스크랜톤(Scranton) 부인이 어린이 12명과 3명의 부인으로 여성주일학교가 먼저 시작되었다. 곽안련 선교사에 의하면처음으로 정식 주일학교가 조직된 것은 1890 년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과 성경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일학교는 교회가 시작될 당시부터 있었다고 하여 주일학교 교육이 1890년 이전인 1988년일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당시 주일학교 초창기에는 주로 선교사들의 수고에 의해서 이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그들의 여러 선교보고서 중에서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 발송된 보고서가 맨 처음으로 접수되어 문헌에 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후 교회가 발전됨에 따라 주일학교의 수도 증가되어 1887년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평양에는 5개의 주일학교가 있었으며 주일학교용 교재(책은 아니었음)도 인쇄하여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1기 한국교회교육의 강조점은 성년교육이었다. 초창기의 한국 교회는 어디까지나 청장년을 중심한 교회의 삶이 특징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교육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같은 현상은 물론 한국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더욱 심했다. 그것은 교회로 찾아 들어오는 성년 층의 수가 급격히 증가해 갔기 때문 이었다. 신자들은 전도활동에 힘썼고 선교사들은 그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으로 세례지원자들과 초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했다.

장년교육은 교회가 확장되고 교인수가 증가하면서 사경회와 장년주일학교의 형태로 발전했다. 먼저 사경회(查經會)라는 교회교육의 원시적 구조는 1903년부터 1907년 사이의 한국교회 대부흥운동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나 그 시초는 1890년으로 소급하여 언더우드(H. G. Underwood)선교사가 서울에서 장년 7명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다. 북부지방서 2소래교회에 2서울에서 3명이었다. 백낙준 박사가 그의 한국선교역사에서 한국의 오순절 시대라고 불렀던 대부흥운동도 1903년 원산에서와 그 후에 평양에서 있었던 하디(R.A. Hardie) 박사의 특별전도회와 성경공부가 그 도화선이 된 것이다. 4일 내지 10일간 일상사를 제쳐놓고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에 전념하는 이 사경회의 불길은 그 후 계속 타올라서 1917년서 18년에 이르는 일년 사이에는 76천여명이나 참여하는 큰 모임으로 성장했다.

사경회에서나 장년주일학교에서나 모두 활동의 중심이 된 것은 성경과의 긴밀한 관계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성경이 일찍이 서민의 언어인 한글로 번역되어 교인대중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무학의 평민과 부녀자들까지도 쉽게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접할 수 있었다.

1905년 선교연합공의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가 조직되면서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고 주일공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 함일 목사가 내한하여 강력히 유년주일학교의 설치를 역설하자 서울 연동교회를 위시하여 평양의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선천 북교회전주 서문교회에서 소아회(小兒會)”를 만들고 별도로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없는 농촌 촌락에서도 전도를 통해 하나 둘 어린이 주일학교를 설립해 나갔다. 이런 주일학교에서는 노래와 성경 이야기를 중심해서 교육 프로그램이 짜여 졌으며 특별히 그림과 이야기가 들어 있는 공과를 채용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되어 발전한 유년주일학교는 계속 눈부신 진흥을 보여1913년 세계주일학교협회 실행총무 하인즈(H. J. Heinz)가 내한한 것을 계기로 서울에서 주일학교대회를 개최했을 때에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무려 14천여 명이나 운집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1919년 말에는 주일학교의 수가 1만 개교를 넘었던 것이다.

교회학교 창설 후부터 곧 주일학교 연합기구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를 통해 세계와의 호흡이 트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이룩된 주일학교 연합기구란 1905신교 선교사 공의회가 설립되면서 그 안에 설치된 주일학교 위원회였다. 이것은 완전히 선교사 중심의 위원회로 주일학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간의 친목 및 그들이 필요로 한 통일공과 편찬이 목적이었다.

그 후 주일학교위원회는 19114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특파원 브라운(F. L. Brown)박사와 합의하여 주일학당(學堂)위원회를 새로 조직하였고 세계기구들과 제휴하여 사업할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주일학당위원회는 19122월 첫 모임을 갖고 13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였으며초대회장에는 서노득(M. L. Swinehart) 선교사가 피선됐다.

1912년부터 세계주일학교협회에서 매년 2천불의 원조를 받아 각종 주일학교 교재를 편집 발간했다. 1913년 봄에 하인즈(H. J. Heinz)와 브라운(F. L. Brown)이 세계주일학교협회 사절단으로 한국에 와서 전국 주일학교를 시찰한 후 한국주일학교 진흥을 위한 5개조의 방안을 제시했다. 같은 해 419일 경무대에서 하인즈 일행을 환영하는 서울주일학생대회를 열었는데 서울과 그 주변의 주일학교 학생 147백여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어 한국주일학교의 위세를 높였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이 서울과 주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총독부 관리들과 불신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또한 1913년 스위스 츄리히에서 열린 제 7회 주일 학교대회에는 신흥우 박사가 참석하여 역시 실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15111일 서울 승동교회와 Y.M.C.A. 강당에서 제 1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참가자는 매주일학교마다 대표자 5명씩총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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