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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국  Homepage Email [2016-01-17 02:19:37]  HIT : 261  

왜 가르치는가

 

손종국 목사(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사람은 왜 해야 하는지 그 행동의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면 목숨을 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이렇게 목숨을 걸만한 동기유발은 우리의 암담한 교회교육의 새로운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우리는 왜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교육에 우리의 한 평생을 걸게 하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확신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534).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구원사역이 충분하게 이루어졌다. 역시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교육에 목숨을 걸만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우리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인해 매일을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5:8)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8:32). 그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뜻을 따라 헌신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교사에게는 당연한 도리이다. 그 많은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을 위한 명령을 주셨다.

먼저, 28:19-20의 지상위임명령이다.

주님은 12명의 제자와 120명의 문도들, 나아가 500여 명의 부활의 증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20)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명령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의 모습으로 순종해야 한다.

이 구절에는 5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본동사는 제자 삼으라이고 가라세례를 주어라’, ‘가르치라는 분사로서 본동사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지키다는 부정사로서 가르치라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제자 삼으라가르치라와 동일한 내용이며 제자들은 사람을 만나서 구원의 도를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그에게 세례를 준 다음 주님의 도를 잘 가르쳐서 지키도록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할 것은 주님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하여서 그대로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교육, 즉 양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은 단순히 지역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근대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 (Pampaedia)이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시에 모든 사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부류로 여성과 가난한 사람, 장애인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사들은 교회에 불성실한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지각하는 아이,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 변화가 더딘 아이 모두가 우리가 품어야할 모든 족속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명령이 지상위임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설이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이 지상위임명령을 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

한번은 예수님을 옹위하던 천사가 물었다.

예수님, 예수님은 저 지상에서 위대한 일, 즉 사탄을 물리치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는 놀라운 일을 시작하셨는데 왜 계속해서 그 놀라운 일을 하시지 않고 이렇게 하늘나라로 오셨나요?”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말씀하셨다.

, 난 그 일을 내 제자들에게 맡겼어.”

또 다른 천사가 물었다. 그는 열정의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만일 제자들이 그 일을 못 해내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예수님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 다른 방법은 없어.”

예수님은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태연하실까? 3년반을 함께 보낸 제자들이 자신의 부탁을 목숨을 다해 실천할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전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도 베드로와 바울처럼 목숨을 다해 제자 삼는 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행 1:8에 나오는 증인으로서의 소명이나 딤후 2:2의 다음 세대를 책임지라는 명령도 동일한 교육에의 명령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에서 배우고 지금의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면 당연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배움을 전수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남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장차 그 선물에 상응하는 선물을 줄 때 의미가 다 한다면 우리가 남에게 배운다는 것은 훗날에 우리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행위를 통해 사도행전이 28장 이후가 지금까지 기록되고 있다.

     

가르치는 것은 가장 큰 가치 

 두 사람이 도서관에 앉아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한 사람은 유능한 인물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효과 있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있다면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장소에서 보내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의 질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상당한 정도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유일하게 자율적인 피조물이다. 인간만이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결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에는 허무주의, 쾌락주의, 자기완성주의에 입각한 대답들이 있지만 사랑이야말로 삶의 참다운 목적이다. 그리고 사랑 중의 제일은 남을 세우는 일이다. 사랑은 남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것은 물질 포함하여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에도 등급이 있다.

먼저 이웃에 대한 선한 도움이다. 내 주변에는 마음을 두고 도움을 주는 제자들이 있다. 그들이 원할 때면 가능한 한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위로와 지도를 하려고 했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어서 늘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에 상쾌하다. 그런데도 때로는 밑천이 생각날 때가 있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실망하면서 이전의 섬김이 아쉽기도 하고 후회가 될 때가 있다.

예전에 지방에서 한 고등학생을 만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편지도 주고 받고 때로는 지방까지 찾아가 밥도 사주고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3때는 매달 용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금 공부를 하고 싶다고 서울로 왔다. 형편이 만만치 않아서 고시원에 들어가면 도움을 주고 휴대폰 비용을 대주기도 했다. 곧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끔 빌려준 돈이 생각날 때가 있어서 놀라곤 했다.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정도인가 보다.

두 번째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베품이다. 이따금 집에서 딸과 아들을 대하면서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용돈을 달라거나, 공부하는데 필요한 물질과 늦은 밤 귀찮아하지 않고 버스 종점으로 마중을 나가는 일이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 어느 부모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까.

하지만 더 고급한 사랑이 있다. 더 지혜로운 부모는 물고기를 달라는 자녀에게 물고기를 줄 뿐 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의 끝은 자기가 없어도 자녀가 늘 같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물고기를 계속 먹게 하기 위해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듯이 가장 큰 사랑이란 그 사람을 가르쳐서 온전한 사람(딤후 3:17)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생을 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소수의 자녀에게만 온 힘을 다 쏟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삶을 또 다른 수많은 다음세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나와 같은 일군, 아니 나보다 더 나은 영적 거인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의 모습이자 목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기에 접어든 한 청년이 1919년 시카고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렸다. 그가 그 집을 고른 것은 근처에 유명한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널리 격찬을 받은 소설 윈저버그, 오하이오를 집필했으며 젊은 작가들을 잘 돕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으며 2년 동안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멀리 산보도 나갔으며 기교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젊은이는 자기의 습작들을 종종 앤더슨에게 가져갔으며 그 노련한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비평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젊은 작가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매번 그는 경청하면서 조심스럽게 노트에 메모해 갔으며 그런 다음 원고를 향상시키기 위해 타자기와 함께 살다시피 하였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셔우드 앤더슨을 만날 때까지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조차 몰랐다.“
 
이 청년은 헤밍웨이였다. 그 후에 앤더슨은 뉴올리온즈로 이사가서 거기서 또 한 청년을 도왔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였다.
 
열망을 품고 있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멘토로서 도움을 준 앤더슨의 역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수년 동안 여러 작가들 중에서도 극작가 토마스 울프와 존 스타인백이라는 젊은이와 함께 작품활동을 했다. 앤더슨의 문하생 중 세 명이 노벨 문학상을, 네 명이 퓰리처 문학상을 탔다. 유명한 문학 평론가 말콤 카울리는 앤더슨을 평하기를 다음 세대의 문체와 비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긴 그 세대의 유일한 작가라고 했다.“

 

여기서 앤더슨의 삶은 실패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제자들이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귀한 가치이다.

 

 

제자는 나의 영광이며 기쁨

      

바울은 자기를 그토록 배척했던 데살로니가 성에 사는 성도들에 대해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5:20)라고 고백한다. 교사로서 뼈아프게 경험했던 탈출의 비애와 아덴까지 끈질기게 뒤쫓았던 저들의 사무친 증오심 속에서도 바울은 자기가 얻게 될 영광과 기쁨의 원천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베뢰아 사람보다 신사적이지 못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 그러나 그들은 교사인 바울의 눈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학생들을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미래의 면류관과 영광으로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바울은 핍박자의 가시 돋친 가해행위마저 면류관으로 다가가는 전초단계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홀랜드 오퍼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1964년에 케네디 고등학교에 부임한 선생님과 학생들의 30년에 걸친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작곡가의 꿈을 키우다 교사의 길에 들어선 홀랜드는 성실하고 따뜻한 교육자상()을 대표한다. 처음엔 생계를 위해 잠시 스쳐가는 직업으로 생각했으나 소질 없는 아이를 격려하고, 말 안 듣는 아이는 다잡으며 음악만큼이나 학생들도 사랑하게 된다.
 
클라리넷을 잘못 부는 거츄드 랭을 돕기 위해 하루 30분씩 시간을 낸다. 수일동안 연습했으면서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랭에게 홀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악보를 보지 말고 클라리넷을 연주해봐"
 
"잘할 수 있는데 스스로를 못 믿기 때문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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